2009/05/24 19:07

옛날에 써놓은 글 국소지향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수업방식 중 하나가 토론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야 영어로는 집중하지 않고 있어도 토론에 끼어들 내공은 아직 안 되니까 영어권 국가와 한국에서의 1:1 비교는 안 되겠습니다만, 하여간 서구 애들은 그나마 훈련이 좀 되어있어서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 - 이것도 참 가열찬 서양교육vs우리교육 떡밥이긴 하지만 - 생들을 보면 가끔은 아직 쪼렙학번인 저로서도 한숨 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까 어제 있었던 국제정치학입문 시간이 가장 최근의 예 되겠습니다. 교수님이 3주간이나 휴강을 하셔서 다들 자유주의 현실주의 기억이나 하실까 의아해지는 시간입니다. 매주 외교관련 칼럼을 하나 읽고 요약분석해서 제출하는 수업인데 교수님이 3주 휴강에도 불구하고 매번 서너 명을 지목해서 발표를 시키십니다. 발표가 끝나면, 자 파티 타임. 토론이 시작되는 겁니다.

먼저 첫 번째 의제에 대해서 서로 비슷한 입장의 두 사람이 나와서 발표를 했습니다. 의제는 북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첫 번째 분이 발표하고 나서는 아무도 토론을 한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저는 신경이 쓰여서 물어보고 싶은 점이 있었지만 일단은 넘어갔습니다. 뭐 두 번째 분도 비슷한 스탠스더군요. 그 분때는 토론을 했습니다.

저 두 분의 스탠스는 간단합니다. '북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는 분명히 협상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 것이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협상이 미진해서 아쉬운 점이 있고 그 점에 대해 끝까지 추궁해야 할 것이다'는 겁니다.

사실 '좋은 건 좋고 나쁜 건 개선해야한다'는 말 만큼 반박하기 어려운 게 있을까요? 문제가 되는 건 그게 현상적으로 불가능할 때이지요. 좋은 것을 취할 것인가 나쁜 것을 개선할 것인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이번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가 그 일례였고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현재 상태라면 그야말로 94년 제네바 합의 때의 원점으로 돌아간 셈인데, 그 때도 우라늄 농축 얘기로 시비가 붙어서 합의가 깨지고 말았다. 협상 보완도 좋지만 경제도 휘청이는 상태에서 다시 그렇게 판이 깨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저도 합의 자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협상에 보완할 것이 있으니 지금 합의는 유지하면서 추가로.....'까지 말하고, 수강생 전체가 웃어버렸습니다. 동어반복이니까요. 교수님이 그 분을 그냥 들여보내주시더군요. 뭐, 북한이 이렇게 막장까지 밀어붙였다가 극적으로 협상에 임하게 된 이유가 아마도 핵검증 의무를 확실히 털고 가고 싶었을 것이라는 제 짐작을 뒷받침해주셨으니 아무래도 좋지만요.

그리고 두 번째 주제였는데, 이게 조금 더 재밌습니다. 의외로 금융위기를 국제정치학에 연계시켜서 생각해보시려는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뭐 국제정치경제라는 과목도 흥미로우니까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한 분은 저와 같은 경영학과 05 선배분이셨는데, 이 분이 잘 나가시다가 마지막에 '파생상품과 금융공학에 종말이 왔다고 보기는 시기상조이므로 미제국주의의 종말도 시기상조다'는 말씀을 해버리신 겁니다.

사실 저 발언만으로 보면 문제가 있는게 맞습니다. 일단 파생상품의 위기가 미국제국의 종언의 시작이라는 원문 칼럼의 전형적인 물타기 논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요, 또 그 논리의 영악한 점이 전제 부분(파생상품)을 받아친다고 해서 결론(미국제국 종언의 시작)을 부정할 수 있는게 아니죠. 애초에 둘이 관계가 있는 건 맞겠지만 완벽하게 인과가 성립하는 게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미국제국 종언과 미제국주의의 종말의 어감상 차이가 또 문제가 되겠습니다.

....만, 어떤 여자분이 억센 사투리로 두 번째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말꼬투리를 잡는 겁니다. '왜 저렇게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라면서. 저는 일단 동의할 수밖에는 없지만 분명히 원문 칼럼이 저 논리를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럼에 대한 분석을 주로 하는 숙제의 특성상(게다가 분량제한도 있고) 있을 수 있는 논리비약이라고 봤습니다만 그 분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봅니다. 저희 선배 분은(저는 모르는 분이긴 했습니다만) 계속 표류하면서 '뭔가 있었는데?' 수준으로 말씀하시다 손을 드시더군요-;;;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본인이 못하는 카운터어택을 제가 하는 것도 그렇고, 주장이 틀렸다고 하기엔 또 석연찮아서 가만 뒀습니다.

.....다만, 교수님이 '수고했고, 시간관계상 여기까지 하고 마지막 한 사람만 더 들어봅시다'라면서 '김**씨'라고 이름을 부르셨을 때......

"네?"라고.

지금까지 열심히 추궁하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대답한 겁니다-;;;;

알고보니 외교학과 분이시더군요. 게다가 04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외무고시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셔도 모자를 판에 대체 일반교양수업에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당신은. 설마 지금까지의 그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논리전개고 뭐고 다 전공수업에서 깨지는 스트레스 해소용이었던건가요. 그런 건가요. 뭐 전공진입자용 국제정치학개론도 듣고 1년이나 지나서 입문 듣는 제가 할 소린 아닌 거 같지만. 전 첫 시간 발표때 이미 들통 다 났다고요.

주제는 같은 금융위기라길래 어떤 논리전개가 나올런가 기대했는데 여기서도 저는좀 벙찐 것이었죠.

80년대 패권쇠퇴론을 들고 나오셨으니. (/담배)


작년에 이래저래 치였던 국제정치학 수업의 스트레스가 잘 들어나 있는 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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